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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결정현황

신문윤리강령과 그 실청요강 및 신문광고윤리강령과 그 실천요강에 위배된 기사와 광고에 대해 심의결정한 사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심의결정 내용을 보여드립니다.
제 943차 심의결정 현황 (2020.06.10.)

경고 2020-1116 [기사] 신문윤리강령  위반 

코로나 극복 국제협력 소통 양보 합의 우선돼야  

수도권일보     발행인  강  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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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문
  수도권일보 2020년 5월 18일자 4면「코로나 극복 국제협력 소통 양보 합의 우선돼야」제목의 칼럼에 대하여 ‘경고’ 한다.  
이 유
  1. 수도권일보는 위 적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에 전 세계가 멈춰버렸다. 컨테이너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쌓이고, 마스크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세상사로 돌아간다. 전염병에 지친 사람들이 눈을 돌린 곳에는 온갖 시신들의 처참한 모습들의 고통과 슬픔의 아픔들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코로나19 위기는 불확실성의 위기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될지, 사망자는 얼마나 될지, 언제까지 지속될지. 백신과 치료제 개발 시기는 언제일지 모두가 안갯속이다. 큰 파도가 휩쓸고 간 후 잔해들을 들춰보고 난 뒤에나 평가할 수 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긴 시간싸움이다. 감염 병의 영향을 예측하는 방법은 과거 유사 사례와 비교하는 것이다. 코로나19와 비교되는 스페인독감은 3차례에 걸쳐 대유행했다. 1918년 봄, 1918년 9월~1919년 1월, 1919년 2~12월 전 세계를 누비며 5000만 명의 희생자를 남겼다.
  그런데도 더욱 암울한 소식이 들렸다.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가 토착 풍토병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확산과 감소를 반복하면 장기간 인류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싸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의 인내심은 고갈된다. 관심과 배려, 존중, 보호와 같은 공동체의 덕목은 사라지고 배타, 혐오, 따돌림, 증오가 자리를 잡는다. 시간이 지나 피해가 커지면 사태를 단순화하면서 비난할 개인이나 집단을 찾는다. 그럼으로 소통과 양보, 합의가 사라지면 전쟁이 찾아온다는 뜻의 말이다.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기업체 고위 임원님들께서는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100만원을 받을지 목하 고민 중이 다는 말을 듣는다. 그들의 심 내는 편치 않아 보였다. 본인 의사를 밝히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내는 그러더라고요, 세금을 많이 내고 있는데…라고요,”
  대통령부터 정부?여당 고위 인사들까지 재난지원금 기부 사실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상황에서 그가 흔쾌히 100만원(4인 가구기준)을 받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1년에 내는 세금이 족히 1억 원을 넘는 그에게 100만원은 큰돈이 아닐 게다. 말을 안 했지만 그가 정부나 사회로부터 자신의 기여가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혹은 상대적 박탈감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재난지원금 기부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접했을 때 ‘묘수’란 느낌도 들었다. 재정건전성을 우려해 지급대상을 소득하위 70%에서 100%로 확대하는 방안에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 나라 살림이 걱정된다면 기부하면 될 것 아니냐”는 암묵적 반박이었고, 기부 그자체가 갖는 숭고함 때문에 대놓고 반대하긴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부와 나눔이 소중한 사회자본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갈수로 재난지원금 기부가‘악수’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재난지원금을 기부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못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재난지원금의 목적은 가계에 소비 여력을 공급해 소상공인을 돕고 경기를 조금이라도 살리려는 데 있다. 국민들이 가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소상공인의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되도록 소비를 유도하는 게 정부가 하는 일이다.
  이달 10일까지 수출이 1년 전보다 46%줄었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수출 쪽에서 코로나19 충격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 내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이다. 국민들의 발길이 동네 작은 가게로 이어지고, 소상공인들이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도록 돕는 게 시급하다는 얘기들이다.
  재난지원의 보편적 지급에 반대했던 쪽에서는 고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새로 증가한 소득 중 소비에 쓰는 비율)이 저소득층보다 낮기 때문에 재난지원금 지급이 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 이론적으로 그럴 수 있겠으나 고소득층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배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바람직한 일인지 안인지 묻게도 된다.
  고소득층은 현실적으로 국가 경제의 주요 세수원이다. 그들의 반발을 우려해 조세정의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으나 조세 저항 심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정책을 펴는 것 역시도 정부의 책무다.
  기부된 재난지원금은 고용보험기금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기부금액에 따라 국가 재정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결정되겠지만, 즉각적으로 소비에 사용하는 것보다 체감효과는 늦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동체의 연대감을 위해서도 모든 국민이 재난지원금을 받는 게 낫다. 복지 대상이 수혜자와 비수혜자로 갈린다는 건 공동체 연대의식 훼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과거 부유층 노인을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부유층 아이들은 학교 무상급식에 포함해선 안 된다고 하며 논란이 일었던 상황이 떠오르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부는 선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재정건전성이 자신이 있습니다. 저도 흔 쾌이 쓸 테니 재난지원금이 어려운 가계에 보탬이 되고, 아무쪼록 소상공인들을 살리는 데 잘 쓰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기부 사실을 공개하는 모습 역시 보기에 불편하다. 차라리 기부란 말 차체를 꺼내지 않는 게 나을 듯싶기도 하다.
  코로나19 파도를 넘는데 정부가 든든하게 뒤에 버티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진정한 리더십이다. 기왕 기부한 사람은 그렇다 치고 아직 수령을 망설이고 있는 기업체 임원?최고경영자를 비롯한 고소득층이나 공직자들이 있다면 흔 쾌이 받으시라 권고하고 싶다. 그간 미뤄둔 소비를 늘려주면서 내수 살리기에 큰 도움을 주면 더 좋겠다.』
< http://www.sudokwon.com/ >
  (서울신문 5월 14일자 30면「송현서의 각양각세(世)/현실로 다가온 세상 ‘디스토피아'」제목의 칼럼)=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514030002&wlog_tag3=naver >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에 전 세계가 멈춰 버렸다. 컨테이너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쌓이고, 마스크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전염병에 지친 사람들이 눈을 돌린 곳에는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여성들을 학대한 이른바 ‘n번방’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 속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전염병에 잠식된 작금의 상황은 정유정의 소설 ‘28’과 닮아 있다. 가상의 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는 개와 사람에게 전염되는 정체불명의 인수공통전염병으로 개들이 무참하게 살처분당하고 봉쇄된 도시에 남겨진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이고, 분노하며, 공멸해 간다.
‘n번방’ 사태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1985년 발표작인 ‘시녀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여성의 몸이 공공재로 소비되는 세계, 계급에 따라 여성이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와 성노예로 전락한 세계, 그래서 때로는 여성이 인간 아닌 가축으로 취급받는 세계를 그린 이 소설은 피해 여성을 ‘노예´로 부르며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하고 소비한 ‘n번방’의 수많은 범죄자를 연상케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소식들이 가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상황에 놓이니,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들이 더는 허구로만 보이지 않는다. 디스토피아 작품의 대표 격인 ‘멋진 신세계’가 다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과학기술의 지나친 남용으로 인간성이 파괴된 암울하고 끔찍한 세계가 배경이다. 하나의 난자에서 180가지의 인간이 생산되고, 실험용 병 속에서 태아가 자라나며, 267일 만에 기계적으로 대량생산되는 태아들은 병마개가 열려야 세상에 나온다.
‘멋진 신세계’는 약 90년 전에 완성된 소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코앞까지 닥친 현실을 그렸다는 점에서 섬뜩하다. 실제로 2018년 중국에서는 유전체에서 원하는 부위의 DNA를 정교하게 잘라내는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을 이용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면역력을 가진 ‘맞춤형 아기’가 탄생했다. 작가는 소설의 내용이 600년 뒤를 예견한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인류가 인조인간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모든 것이 사이버 머니로 결정되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린 드라마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 ‘핫 샷´, 핵전쟁으로 인해 더이상 살 수 없는 지구를 떠나 우주정거장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그린 드라마 ‘원헌드레드´ 등도 허구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디스토피아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와 드라마, 소설 속 한 장면을 눈앞에서 봐야 하는 지금, 어떤 디스토피아가 가장 먼저 현실이 될지, 그 현실이 얼마나 암울할지 두려워하는 이가 적지 않다. 무엇이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를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지, 성별을 둘러싼 양극화와 혐오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인간성을 말살하는 과학과 기술은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등의 현실적 고찰이 없다면 디스토피아는 머지않아 더이상 허구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경향신문 5월 15일자 31면「박종성 칼럼/마차가 끊기면 전차가 온다」제목의 칼럼)=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142022035&code=990100 >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코로나19 위기는 불확실성의 위기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될지, 사망자는 얼마나 될지, 언제까지 지속될지, 백신과 치료제 개발시기는 언제일지 모두가 안갯속이다. 큰 파도가 휩쓸고 간 후 잔해들을 들춰보고 난 뒤에나 평가할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경제적 파장을 두고 다양한 주장이 쏟아졌다. ‘V자 반등’부터 ‘U자 회복’, ‘L자 침체’까지 세칭 전문가들의 전망들이 나왔다. 지금까지 대체로 동의하는 지점이 있다. 후유증이 단기간에 그치고 ‘V자’ 반등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하는 주장은 자취를 감추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은 시간싸움이다. 감염병의 영향을 예측하는 방법은 과거 유사 사례와 비교하는 것이다. 코로나19와 비교되는 스페인독감은 3차례에 걸쳐 대유행했다. 1918년 봄, 1918년 9월~1919년 1월, 1919년 2~12월 전 세계를 누비며 5000만명의 희생자를 남겼다. 그런데 더욱 암울한 소식이 들렸다.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가 토착 풍토병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확산과 감소를 반복하면서 장기간 인류를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싸움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내심은 고갈된다. 관심과 배려, 존중, 보호와 같은 공동체의 덕목은 사라지고 배타, 혐오, 따돌림, 증오가 자리를 잡는다. 시간이 지나 피해가 커지면 사태를 단순화하면서 비난할 개인이나 집단을 찾는다. 의사이자 보건학 교수인 한스 로슬링은 < 팩트풀니스 >에서 이를 인간의 ‘비난 본능’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전염병이 발생하면)비난할 사람이 필요하고 어떤 외국인이 병을 옮겼다면 그 사람이 속한 나라를 통째로 비난한다”고 말했다. 물론 자세한 조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상황과 유사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국가는 다른 나라와의 장벽을 높이고 각자 제 살길 찾기에 나선다. 1720년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 프랑스 마르세유에는 극단적인 여행금지조치가 내렸다. 군대가 동원됐고 2m에 달하는 장벽이 세워진 바 있다. 전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번 코로나19의 창궐로 ‘21세기 버전’으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각국은 여행객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국경봉쇄에 나섰다. 그러면서 자국만 살겠다고 나서는 경제민족주의의 길로 나가고 있다.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벌어진 ‘마스크 쟁탈전’은 세계가 예기치 못한 외부 충격에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었다. 각국은 마스크를 한 장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전통적인 선린 우호관계는 평화 시에 건네는 입에 발린 외교적 언사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보호무역과 국수주의로 흐르는 길을 더욱 넓혀 놓았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국우선주의로 돌아선 미국은 팬데믹 이후 이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갈등은 더 첨예해지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코로나19의 진원지라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태세다. 중국에 진출한 자국 기업에 국내로 돌아오라고 회유하고 있다. 중국에 생산기지를 둔 나라들도 하나둘 ‘차이나 엑소더스’를 밝히고 있다.
최강국인 미국이 자국우선주의로 돌아서면서 세계는 리더십 없이 코로나19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10여년 전 금융위기 당시에는 주요 국가들이 소통하고 공동의 방안을 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세계 경제는 공동의 계획을 가지고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난파에 처한 배에 선장이 사라진 상태나 다름없다. 세계는 자유무역과 국제협력 대신 경제민족주의와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세계의 선택은 분명하다. 우리 앞에 놓인 숙제는 한 개의 국가 단위로 해결될 수 없다. 당장 코로나19 백신 개발도 지구차원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이들 약품을 저렴하고 안전하게 사용하기까지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더욱이 감염병 팬데믹은 이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추가로 발병해 연례행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뿐인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기후변화도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 간의 소통과 협력 없이는 해결 불가능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일에 매몰돼선 미래가 없다. 세계화로 인해 많은 상처가 났을지언정 그래도 각자도생, 국수주의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대로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에 민족주의는 절대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마차가 끊기면 전차가 온다. 소통과 양보, 합의가 사라지면 전쟁이 찾아온다.


(경향신문 5월 15일자 30면「편집국에서/“사장님, 재난지원금 받으셔도 됩니다”」제목의 칼럼)=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142026015&code=990100 >
기업체 고위 임원 ㄱ씨는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100만원을 받을지 목하 고민 중이다. 그의 심내는 편치 않아 보였다. 본인 의사를 밝히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내는 그러더라고요. 세금을 많이 내고 있는데…라고요.” 대통령부터 정부·여당 고위 인사들까지 재난지원금 기부 사실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상황에서 그가 흔쾌히 100만원(4인 가구 기준)을 받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1년에 내는 세금이 족히 1억원을 넘는 그에게 100만원은 큰돈이 아닐 게다.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정부나 사회로부터 자신의 기여가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혹은 상대적 박탈감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재난지원금 기부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접했을 때 ‘묘수’란 느낌도 들었다. 재정건전성을 우려해 지급대상을 소득하위 70%에서 100%로 확대하는 방안에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 나라살람이 걱정된다면 기부하면 될 것 아니냐”는 암묵적 반박이었고, 기부 그 자체가 갖는 숭고함 때문에 대놓고 반대하긴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부와 나눔이 소중한 사회자본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갈수록 재난지원금 기부가 ‘악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재난지원금을 기부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못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재난지원금의 목적은 가계에 소비 여력을 공급해 소상공인을 돕고 경기를 조금이라도 살리려는 데 있다. 시민들이 가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소상공인의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되도록 소비를 유도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이달 10일까지 수출이 1년 전보다 46% 줄었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수출 쪽에서 코로나19 충격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 내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이다. 시민들의 발길이 동네 작은 가게로 이어지고, 소상공인들이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도록 돕는 게 시급하다는 얘기다.
재난지원금의 보편적 지급에 반대했던 쪽에서는 고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새로 증가한 소득 중 소비에 쓰는 비율)이 저소득층보다 낮기 때문에 재난지원금 지급이 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이론적으로 그럴 수 있겠으나 고소득층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배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바람직한 일인지 묻게 된다. 고소득층은 현실적으로 국가 경제의 주요 세수원이다. 그들의 반발을 우려해 조세정의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으나 조세저항 심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정책을 펴는 것 역시 정부의 책무다. 기부된 재난지원금은 고용보험기금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기부금액에 따라 국가 재정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결정되겠지만, 즉각적으로 소비에 사용하는 것보다 체감효과는 늦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동체의 연대감을 위해서도 모든 시민이 재난지원금을 받는 게 낫다. 복지 대상이 수혜자와 비수혜자로 갈린다는 건 공동체 연대의식 훼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과거 부유층 노인을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부유층 아이들은 학교 무상급식에 포함해선 안 된다고 하며 논란이 일었던 상황이 떠오르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부는 선의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재정건전성 자신 있습니다. 저도 흔쾌히 쓸 테니 재난지원금이 어려운 가계에 보탬이 되고, 아무쪼록 소상공인들을 살리는 데 잘 쓰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기부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부 유도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기부 사실을 공개하는 모습 역시 보기에 불편하다. 차라리 기부란 말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게 나을 듯싶기도 하다.
코로나19 파도를 넘는데 정부가 든든하게 뒤에 버티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진정한 리더십이다. 기왕 기부한 사람은 그렇다치고 아직 수령을 망설이고 있는 기업체 임원·최고경영자를 비롯한 고소득층이나 공직자들이 있다면 흔쾌히 받으시라 권고하고 싶다. 그간 미뤄둔 소비를 늘려주면서 내수 살리기에 도움을 주면 더 좋겠다.


  2. 위 칼럼에 대해 윤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수도권일보의 위 적시 칼럼은「수도권 칼럼」연재란에 게재된 칼럼이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재난지원금 효과와 정부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 칼럼은 그러나 서울신문 칼럼 1편과 경향신문 칼럼 2편을 짜깁기해 만든 것이다. 적시 칼럼은 모두 17개 단락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첫째 단락은 서울신문 5월 14일자 30면「송현서의 각양각세(世)/현실로 다가온 세상 ‘디스토피아’」제목의 칼럼 첫 번째 단락과 거의 같다.
  그 다음 4개 단락은 경향신문 5월 15일자 31면「박종성 칼럼/마차가 끊기면 전차가 온다」제목의 칼럼에서 발췌했다. 나머지 12개 단락은 경향신문 5월 15일자 30면「편집국에서/“사장님, 재난지원금 받으셔도 됩니다”」제목의 칼럼 전체를 그대로 옮겼다.
  기자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칼럼을 쓰면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언론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로 기자의 도덕성과 신문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신문윤리실천요강 제8조「출판물의 전재와 인용」②(타 언론사 보도 등의 표절 금지)를 위반했다고 인정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적용 조항
신문윤리실천요강 제8조「출판물의 전재와 인용」②(타 언론사 보도 등의 표절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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