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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세미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한국언론재단 세미나

2009.05.14. - 2009.05.15. / 발제자 : 이준웅 / 주제 : 무너지는 사실보도와 의견보도 원칙

조회 : 1876
  • 무너지는 사실보도와 의견보도 원칙

    이준웅

    1. 문제 제기: 한국 언론의 경향성

    나는 우리 언론의 가장 큰 문제가 ‘경향성(tendentiousness)'이라 본다. 경향성이란 사안에 대한 개별 기사의 논조, 편집국의 사안에 대한 접근 방식, 그리고 언론사의 전반적인 편집 방향 등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방식을 지칭한다. 경향적인 기사의 제목은 흔히 기사 내용의 일부를 강조해서 해석을 유도한다. 경향적 기사의 내용은 ‘틀 지워져(framed)' 있으며, 정보원과 인용문이 선택적이다. 결정적으로 보도하는 사안의 의미, 중요성, 관련성 등의 판단에 편향이 내재한다. 사안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기사를 경향적 기사라 할 수 있다. 한국 언론의 경향성은 사설, 논설, 의견기사, 탐사기사, 피처 등은 물론 일반 사실 기사, 심지어 스트레이트 단신에서도 발견된다.

    한국 언론의 경향성은 우연한 것 같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언론의 지사적 전통이 경향적 보도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장지연, 신채호, 서재필 등의 최초의 언론인들은 계몽적 선각자였으며, 해방 후 언론인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유신시대의 동아·조선 투위를 겪은 언론인들과 80년대 이후의 언론민주화운동 시대의 언론인들은 모두 민주주의, 자유주의, 언론의 독립 등을 강력하게 주창한 이른바 운동적 시각을 지녔다. 이렇듯 계몽적 선구자, 가치의 주창자, 민주주의 수호자 등의 역할을 자임해 온 한국 언론인은 지금도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열중한다. 이런 전통의 견지에서 보면, 경향성은 우리 언론의 핏줄에 내재한다.

    경향성은 우리 언론의 중요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언론의 관행 중에, ‘야마'를 활용해서 사건을 지칭하고, 취재 지시를 하고, 정보원을 정하며, 기사를 작성하는 관행이 있다. ‘야마'란 취재 및 보도 현장에서 기사의 주제, 핵심, 논조 등을 두루 지칭하지만, 분석적으로 보면 이는 데스크와 기자가 공유하는 사안에 접근하는 방법, 기사의 틀(frame), 논조 등의 결합인 것으로 보인다. 신입기자는 ‘야마를 잡는' 방법을 교육 받으면서 숙련된 기자가 된다. 취재와 기사작성의 모든 단계에서 편집 데스크와 일선 취재기자가 사안에 대해 논의할 때 ‘야마'가 동원된다. ‘야마'가 다르면 같은 사안을 두고서도 언론사마다 전혀 다른 접근, 논조, 평가를 보이는 기사를 쓰게 된다. ‘야마'를 잡고 기사를 쓴다는 것은 사안에 대해 특정 방향으로 접근해서,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취재와 보도의 경향성이 구체화되는 관행이 된다.

    시민들도 한국 언론의 경향성이 문제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언론재단이 2008년 5천명의 성인 시민을 대상으로 수행한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의하면, 시민들은 우리 언론의 정치적 편파성, 사회적 편향성, 그리고 자사 이기주의 등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정파성, 편향, 주관성 등은 모두 경향성의 구성요소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신문기사가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다'는 평가에 전체 응답자의 69%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국민 이익보다 자기 회사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데 68%, ‘부유층과 권력층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데 66%가 동의했다. 방송뉴스에 대한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라는 데 63%, ‘선정적이고 흥미위주로 편집한다'에 61%, 그리고 ‘국민의 이익보다 자기 회사의 이익을 우선한다'에 61%가 동의했다.

    기사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언론의 ‘경향성'이란 근본적으로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라는 고전적 언론 규범을 위반할 때 발생한다. 언론은 사안의 전개와 결과에 대한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주요 사안에 대한 ‘의견'을 밝히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누구도 언론이 의견, 평가, 주장 등이 보도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사실은 사실로서 보도하고 의견은 의견으로 보도함으로써, 독자가 ‘명시적으로 경향성이 배제된' 사실 기사를 ‘명시적으로 경향성을 드러내는' 의견 기사로부터 구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명해 보이는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규범은 우리 현실에서 참담하게 무시되고 쉽게 위반되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언론의 경향성 그리고 그 기초인 ‘사실과 의견의 구분'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찾기 어렵다.

    이 글에서 나는 한국 언론의 경향성을 교정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해서 보도할 것'이라는 전통적 언론 규범을 확장해서 ‘참과 옳음에 대한 타당성 주장을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전통적인 사실과 의견의 구분에 대한 주장은 두 가지 전제를 포함한다. 첫째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실과 의견을 구분함으로써 언론의 경향성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첫 번째 전제는 불가능하며, 두 번째 전제는 필연적이지 않다. 따라서 얼핏보면, 나는 사실과 의견의 분리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착을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사실과 의견을 분리하다고 해서 언론의 경향성이 완화되는 것도 아닐 수 있는데, 쓸데없이 불필요한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당착과 무용함을 극복하고 일관된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이 글의 과제이다.

    결국 나는 ‘사실과 의견의 구분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언론 윤리에 대한 체계적인 주장을 전개하고, 그 주장이 한국 언론의 ‘경향성 완화'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짐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사실과 의견의 분리에 대한 언론학의 주된 관점을 논하고, 특히 사실과 가치의 구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검토하겠다. 그리고 언론의 사실적 주장과 규범적 주장이 갖는 보편적인 규범성을 지적함으로써, 이 문제와 관련한 언론 윤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뉴스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사실과 의견의 분리'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목표를 제시하려 한다.

    2. 한국 언론의 경향적 특성

    한국 언론의 경향성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신문윤리위원회가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위반한 것으로 주의를 환기한 기사를 검토하겠다. 이런 경향성이 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 논의하려 한다.

    1) 경향적 언론 보도의 사례와 특징

    신문윤리위원회가 제정한 < 신문윤리실천요강>은 보도준칙을 통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기자는 사실과 의견을 명확히 구분하여 보도기사를 작성해야 한다. 또한 기자는 편견이나 이기적 동기로 보도기사를 고르거나 작성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제3조 보도준칙 ①항). 그러나 이런 요강이 무색하게도 사실과 의견의 구분 조항은 심각하게 위반되고 있다. 신문윤리위원회에 따르면, 이 조항을 위반하는 사례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심의결정 사항 중 10건이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위반하는 사례였는데, 2008년 이는 22건으로 증가했다.

    매일경제 2008년 4월 7일자 <너무나 이기적인 현대차노조/ 울산 3공장, 다른 물량 더 안준다고 주말 특근 거부>라는 기사가 한 예이다. 기사의 리드는 “현대자동차 생산공장 사이에 차종 생산물량 배분에 불만을 품은 공장에서 특근을 거부하는 사태가 또 발생했다”고 시작했다. 이 기사는 노조의 특근 거부와 노사합의 파기에 대한 책임 공방전을 소개하면서, 사측의 주장을 중심으로 기사를 몰아간 경우이다. 특히 기사 제목 자체가 “너무나 이기적인”이라는 윤색적인 표현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은 사측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제목을 통해 경향성을 드러낸 경우다. 이 기사는 신문윤리위원회에서 주의 결정을 받았다.

    한겨레 2008년 6월 13일자 4-5면 <‘사의 표명' 내각 성적표/ 김도연 교육과학부 학교자율화 등 ‘청와대 해바라기' 무력하기만>이란 기사는 이명박 정부의 장관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평가한 기사이다. 이 기사의 문제점은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주요 장관에 대한 평가를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근거로 그런 비판적 평가를 내렸는지 제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기사 내용 중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노동부가 아니라 차라리 기업부라고 이름을 바꾸라”라는 비판을 받는다. ‘친기업' 발언을 쏟아내 노동계의 공분을 샀다. 민주노총은 사퇴를 촉구했고, 한국노총도 자제하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그만큼 현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에 철저히 코드를 맞췄다는 뜻이다”고 했다. 기사의 부정적 논조는 말할 것도 없지만, 도대체 누가 기업부라고 이름을 바꾸라 했다는 것인지, 민주노총이 사퇴를 촉구한 배경은 무엇인지, 한국노총의 왜 자제하라고 당부했다는 것인지 근거가 전혀 없다. 결국 기사 내용의 사실성을 확인할 길이 없으며, 기자가 “비판, 공분, 당부” 등의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경향적 편향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문화일보 2008년 6월 14일자 <정연주 사장, 2000억 승소 확실한 소송을 왜?>라는 기사도 신문윤리강령 위반으로 주의를 받은 기사이다. 이 기사는 KBS가 서울지방국세청을 상대로 한 법인세부과취소소송에 승소해서 2000억을 돌려받을 수 있었는데도, 소송을 취하한 이유를 전했다. 기사 내용은 검찰의 수사 동기와 수사 방향을 소개하고, KBS 측의 해명을 담고 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단계에서, 고발과 해명만 있을 뿐 사실관계가 분명치 않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기사의 리드는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정연주 사장을 조만간 소환 조사키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제목 역시 “왜?”라는 의문사를 제기함으로써 의혹이 있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신문윤리위원회는 이를 사실에 기초하기보다 예단을 갖고 접근한 것으로 보고 주의 조치했다.
    조선일보 2009년 1월 9일자 <허무맹랑한 주장, 기득권층 비난한 글 많아>는 제목의 기사는 미네르바의 인터넷 게시글의 내용에 대한 소개와 평가를 제시했다. 그런데 기사는 “검찰에 체포된 미네르바는 30대 무직에 독학으로 경제를 공부한 것 외에는 특별한 이력이 없었다. 부실한 기초에 기반했기 때문에 그가 펼쳤던 논리들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가 체포되기 전부터 허점이 많은 것으로 지적돼 왔다”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제시하고 있다. 리만브라더스 파산과 환율에 대한 일부 예언이 적중한 것을 소개하면서, 익명의 민간연구소 연구원의 말을 빌려 “미네르바의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폄하하고 있다. 검찰에 체포된 미네르바의 입장이나 주장을 정당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기사 내용은 없었다. 특히 이 기사는 미네르바의 예측이 결과적으로 적중했을 경우에는 운이 좋은 경우이고, 반대로 빗나갔을 경우에는 근거없이 예측해서 틀렸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기준으로 기사의 경향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경우로 볼 수 있다.

    사례에 대한 관찰을 기초로, 사안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는 ‘경향적 기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사실의 선택: 사실을 선택적으로 제시한다. 복잡한 사실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만을 제시하는데, 특히 취재원과 인용문 등을 선택적으로 제시한다. (2) 윤색적 표현: 특정한 관점에 근거해서 평가적 함축이 있는 표현을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논란이 예상 된다', ‘의혹을 산다', ‘혼란을 유발한다' 등과 같이 부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기대 된다', ‘순항 중이다', ‘전망 있다' 등과 같이 긍정적 의미가 함축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기사의 제목을 통해 윤색적 표현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기사 내용에 대한 해석을 한 쪽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3) 전제된 가치: 기사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내용이나 가치를 부여하는 내용 등을 당연한 전제로 가정한다. 예를 들어, 사회경제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시장 효율성'을 전제로 가정하는지 ‘공공성 확보'를 전제로 가정하는지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경향적 기사는 이 때 어느 한 가지 가치를 전제하고 다른 가치는 무시한 채 사실 관계를 기술한다.

    위에서 제시한 경향적 기사의 특징은 사실 주장을 담고 있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적용된다. 하지만 사안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제공하는 해설 기사나, 사회 현실에 대한 고발과 폭로를 담고 있는 탐사 기사, 그리고 개인의 주장과 의견을 전달하는 의견 기사 등도 경향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의견 기사의 경향성은 사실 기사의 그것과 구성 방식이 다르다. 후자가 선택, 윤색, 가치 등의 개입을 통해 나타난다면, 전자는 전제된 규범의 위반을 통해 나타난다. 다시 말해, 특정 가치나 규범을 옹호할 것으로 기대되는 의견 기사의 경우에도, 사실성, 균형성, 공정성 등과 같은 보편 규범이 위반될 때에는 경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1) 근거 없는 의견: 사실적 근거 없이 평가, 판단, 의견의 결과만을 제공한다. (2) 불균형: 상반된 평가, 판단, 의견이 가능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한 쪽의 평가, 판단, 의견만을 강조해서 제공 한다. (3) 불공정: 기사를 통해 비판 받거나 평가 받는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다. 즉 평가, 판단, 의견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의 해명과 주장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

    2) 경향적 보도의 원인과 결과

    우리 언론은 왜 이런 경향성을 보이는가? 스스로의 경향성을 알지 못해서 그런가, 아니면 알면서도 무능해서 대처하지 못하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러한가? 첫째, 알지 못해서 경향적이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언론학자와 평자들이 한국 언론의 불공정성, 편파성, 의도성 등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제시한 바 있으며, 신문윤리위원회를 비롯한 전문적 기구에서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특히 선거보도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안을 다루는 보도에 대한 검토와 비판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 경우 검토와 비판의 기준은 다름 아닌 언론사가 자체적으로 제정한 언론윤리요강 등에 규정된 공정성, 사실성, 사실과 의견의 분리 등의 조항이다. 따라서 한국 언론이 이런 비판을 모른 채, 경향적으로 보도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경향적 보도를 하는 줄 알면서도 다른 어떤 이유로 대처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의 문제제기에서 나는 우리 언론이 경향성을 띄는 배경으로 (1) 지사적 전통과 (2) ‘야마' 관행과 같은 취재보도 관행을 지적했다. 즉 논쟁적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가치를 옹호하고, 일방적으로 주장을 제시하며, 사회를 계몽하는 것이 언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사명에 대해 계몽적, 참여적, 주창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데 이런 신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경향성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전통은 사안을 정의하고, 중요한 요점을 두드러지게 하며, 취재원과 인용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는 관행인 ‘야마 잡기'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사의 경향적 특징은 계몽적 목적을 위해, 주창적이며 참여적 관점에 따라, 그리고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 언론인들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와 같은 원칙을 진심으로는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언론은 의도적으로 경향성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수적인 논조를 표방하는 언론사는 그런 편집 경향을 유지하는 것이 안정적으로 구독자를 유지하고, 광고 수입을 확보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경향의 언론사도 그런 입장을 유지하는 것이 경쟁적 시장에서 살아남는 전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갈등적이고 분열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중도를 지향하고 모든 관점을 아우르는 편집을 하는 것은 잠재적 독자를 확보하는 상책이 아니라, 충성스런 독자를 빼앗기는 하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이 타당하다면, 이는 미국의 대중지의 등장을 통한 객관성 및 사실성 규범의 확립 과정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19세기 초 미국 대중지의 등장은 대도시의 광범한 신중산층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정파성을 버리고 상업적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객관성과 사실성에 대한 추구와 같은 미국 언론의 핵심적 규범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Schiller, 1981; Schudson, 1978).

    경향적 보도는 독자에 대해서는 물론 궁극적으로 언론사에 대해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먼저 독자에 대한 영향을 생각해 보면, 경향적인 뉴스를 접한 독자는 언론이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는 바에 따라 제한된 정보와 편향된 해석을 얻게 될 것이다. 경향적이며 정파적 언론만을 접할 수밖에 없는 시민들은 체계적으로 제한된 정보와 해석만 접하게 된다. 혹자는 경향적 언론이 지배적인 환경에서, 서로 다른 편집 방침과 논조를 갖는 두 개 이상의 언론을 보는 시민들은 결국 대립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시민들이 두 개 이상의 언론을 비교해서 보고, 비교 결과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성립한다.

    경향적 보도는 또한 언론사에 대해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언론의 경향성은 부정적 평가의 원인이 되고,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언론은 결국 신뢰를 잃어 독자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준웅과 최영재(2005)는 한국 신문의 구독률 하락의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공정성 위기에 있다고 보았다. 전국의 1200명 성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근거로,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정치적 이념이 극단적인 시민들이 신문을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신문이 편향적이고 불공정하다는 인식을 갖는 독자들은 점차로 신문을 덜 보게 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결국 신문의 정파성이나 편집방침이 뚜렷할수록 안정적으로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불공정하고 편향적이라고 평가되는 신문은 점차로 독자를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3. 의견과 사실의 분리

    언론의 경향성은 정파성, 편파성, 불공정성, 주창성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실행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뉴스의 사실적 주장과 규범적 주장이 혼재되어 제시되기 때문이다. 특히 가치와 판단이 개입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특정 가치와 판단이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담길 경우 경향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검토하기 전에 과연 그런 분리가 가능한지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한다. 불가능한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 사실과 가치의 분리

    사실과 가치의 분리에 대한 고전적 주장을 흄의 명제인 “당위(ought)를 존재(is)로부터 도출할 수 없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존재에 대한 판단은 사실을 묘사하며, 이로부터 어떤 당위에 대한 판단도 도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이란 언제나 현상에 대한 그림과 같은 의미(“pictorial semantics”)를 갖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어떤 사실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그 것을 닮은 것을 제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utnam, 2002). 그런데 그림과 같지 속성을 갖지 못하는 생각들이 있다. 감정이나 정서 등과 연관된 가치나 덕성 등과 같은 생각들이 그것이다. 가치나 덕성 등은 그림과 같지 않으며 따라서 사실을 표상하는 않는다. 이렇듯 사실과 가치는 그 표상적 특성이 다르며, 결국 둘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칸트는 가치와 관련된 판단은 ‘명령(imperative)'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즉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는 판단은 사실은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명령인데, 이는 사실에 대한 묘사나 기술이 아니다. 이런 도덕적 판단은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적 판단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임을 주장했다. 현대 실증주의자는 이런 칸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적 판단은 가치를 전제하는 데, 그것은 사실과는 달라서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자 또는 반실재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의미있는 명제는 ‘사실적'이거나 아니면 ‘분석적'이어야 하는데, 일단 도덕적 판단은 사실적 명제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관찰에 의해서 확인되며,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사실인 것이다. 도덕적 판단은 가치를 전제하며, 관찰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 사실적 명제가 아닌 도덕적 판단이 참과 거짓을 산출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논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동어반복적인 ‘분석적(analytic) 명제'일 수밖에 없는데, 도덕적 판단은 분명 이것도 아니다. 즉 도덕적 판단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화자의 행동 의지나 감정을 표출한 것일 뿐이다. 무엇이 옳다거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도덕적 주장은 사실은 ‘안 돼!'라고 소리치거나 ‘좋구나!'라고 감탄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다. 반실재론자들은 사실은 객관화시키고, 가치는 탈합리화시킴으로써, 그 둘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그러나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뜻밖에 ‘사실' 쪽에서부터 무너진다. 사실을 주장하는 개별 문장이 결코 참 거짓으로 완전히 확증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수학적 논증이나 논리적 동어반복과 요소의 ‘의미' 연관에 의해서 참이 되는 경우와, 사실적 문장과 같이 ‘관찰'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참이 확인되는 경우를 구분해야 주장이 있다. 전자는 분석적 명제, 후자는 종합적 명제라 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실증주의자는 도덕적 판단이 관찰에 의해 확립되는 종합적 명제라 볼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분석적 명제이거나 아니면 어떤 참과 거짓과 관련 없는 문장이라고 본다. 콰인(Quine, 1960)은 분석과 종합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밝혔다. 그는 관찰을 통해 개별 문장의 참 거짓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개별 문장의 구성 요소가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바가 분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지시의 불가투시성(inscrutibility of reference)'에 따르면 문장의 참 거짓은 개별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개별적 종합적 명제, 즉 사실적 문장은 참 거짓을 확인할 수 없다. 모든 경험적 대상에 조응하는 이론 전체가 참 또는 거짓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분석과 종합의 구분이라는 경험주의의 핵심 명제는 일종의 도그마임이 밝혀진다. 이렇듯 자명한 듯이 보였던 분석과 종합의 구분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원초적인 구분이라 할 수 있는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일단 콰인에 의해서 ‘사실'을 확립하는 분석과 종합 명제의 구분이 무너지고 난 후, 사실과 가치의 구분에 대한 기존 논의는 급격하게 불분명해진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간주되었던,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이제 철학적으로는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1) 퍼트남(Putnam, 2002)은 객관주의적 관점에서 사실을 검증하려는 판단이 ‘가치들'을 전제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이론을 선택하는 데, 반드시 가치가 개입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현상을 개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이론을 선택하는 데, 당연히 가치가 개입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이론을 확인하는 개별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 즉 검증 과정에도 가치들이 개입한다. 예를 들어, 가설을 검증하는 데 수반되는 일련의 판단에 필수적인 일관성(coherence), 단순성(simplicity), 합리성(reasonableness), 자연성(naturalness) 등도 모두 일종의 가치라는 것이다. 요컨대, 사실은 가치를 전제로 확립된다.

    (2) 머독(Murdoch, 1971)은 일찍이 일상적으로 도덕적 개념들 중에 어떤 것은 추상적이며 다른 것은 보다 서술적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도덕 개념은 단순히 표현적이거나 명령적인 요소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풍부하게 기술하는 요소를 동시에 갖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두터운 개념들(thick concepts)'이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들은 예를 들어 ‘잔인하다', ‘정숙하다', ‘버르장머리 없다', ‘배려한다' 등을 포함한다. 이런 두터운 개념들은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적용되는 사태에 대한 특징과 더불어 그런 특징이 갖는 도덕적 함축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를 ‘잔인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함축하는 과도한 괴롭힘과 그에 수반하는 비윤리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동시성이 이 두터운 개념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는 사실과 가치를 풀어 헤칠 수 없게 뒤섞여 있다.

    (3) 본드(Bond, 1996)는 가치를 함축하는 도덕적 판단도 사실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사실과 가치의 구분을 해소시킨다. 그는 먼저 무어(Moore, 1903)의 ‘자연주의 오류'에 대한 비판에 근거해서, 가치 판단이 참이나 거짓으로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사실이 단순한 개관적 자료에 대한 검증에 근거한 경험적 사실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가 사실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어가 주장했듯이 가치가 ‘비자연적'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사실의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사실을 넓게 해석해서 ‘객관적으로 참이 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이 실천적 이성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런 판단은 객관적으로 참이 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을 선택하는 이유가 제시되어야 하는 데, 바로 그 이유가 공동의 안녕이나 공동선과 같은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이유이거나 ‘약속 수행', ‘공정함', ‘자비로움' 등과 같이 모두가 수용한다면 공동체의 안녕이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이유라면 합리적으로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언론의 사실과 의견의 분리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언론 규범은 다른 ‘언론의 객관성' 관련 규범과 마찬가지로 미국 언론의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다. 문예적이며 비판적인 전통이 강한 유럽의 언론과는 달리 초창기부터 정파성과 상업성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이 주요한 관건이었던 미국 언론은 스스로를 전문직화하는 과정에서 ‘언론의 객관성'이란 가치를 일종의 직업적 이념으로 제도화시켰다 (Schudson, 2001). 정당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상업적인 성공을 노렸던 대중지(the penny press)들이 최초로 객관성 관련 규범을 발전시켰다. 의견과 사실의 구분은 중립성과 사실성의 강조, 역피라미드 스타일의 도입, 인터뷰 기법의 발전 등과 마찬가지로 객관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미국 언론의 객관성 이념은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세련화된다. 정부의 조직적인 선전선동에 휘둘리고 상업적인 광고홍보의 영향력에 압박을 받으면서 ‘사실'에 대한 불신이 강화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사실에 대한 확신이 아닌 불신, 그리고 언론인이 범할 수 있는 주관성에 대한 염려가 역설적으로 객관적 사실을 확립하기 위한 전략적 규범으로 강화되어 나타났다 (Schudson, 1978). 20세기 초 미국의 언론인들은 정부와 기업의 영향력에 대한 불신과 언론인의 주관성과 타락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당대의 ‘과학자들의 방법론'이었던 경험주의적이며 실증주의적인 검증의 원칙, 주관성 배제의 원칙 등을 사실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적인 절차나 전문화된 관행으로 수용했는데,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라는 경험주의 이분법도 이 과정에 도입되어 강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미국 언론인들은 이미 ‘객관적 보도란 달성할 수 없는 이상적 목표'라는 인식을 폭넓게 갖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언론인들이 사실과 가치를 구분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이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 일종의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l)'로 작동했던 것이다.

    터크만(Tuchman, 1978)은 미국 언론인들이 ‘사실'을 확립하는 방식을 이용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견해를 담아내는 기법을 간파해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미국 언론인들이 ‘확인이 불가능한 사실'을 보도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른바 ‘사실성의 망(the web of facticity)'를 이용해서 그것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가) 어떤 정치인이 의심스러운 ‘A'라는 주장했을 때, 'A' 내용의 사실성은 의심스럽더라도, “그 정치인이 A를 주장했다”는 것을 사실로 삼아 보도한다. (나) 사실에 근접하고 잘 알 것으로 인정되는 인물이나 기관을 중심으로 보도함으로써 사실성을 강화한다. 마지막으로 (다) 직접 인용을 사용함으로써 언론인의 주관성이 개입하지 않은 인용사실을 제시하는 방식이 있다. 특히 인용부호를 사용하는 방식의 경우, 기자는 이 진술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인용된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고, 따라서 기자 자신의 견해나 판단이 개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결국 이 경우 가치와 사실은 효과적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과정을 통해서 기자의 주관적 견해를 강조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셧슨이 제시한 미국 언론의 객관성 규범의 강화에 대한 설명과 터크만이 제시한 사실성 확립 기제에 대한 설명은 모두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라는 언론 규범이 이중적으로 복잡하게 작동하는 전략임을 시사한다. 사실에 대한 불신과 주관성에 대한 염려가 언론의 객관성 규범의 강화를 유도했다. 그리고 주관적 견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직접 인용부호를 사용한다. 에트마와 글래서(Ettema & Glasser, 1998, 83)에 의하면 언론의 ‘사실과 의견의 구분'은 일종의 담론 전략이다. 기자는 이런 전략을 활용해서 (가) 주관적인 도덕적 판단이나 담론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고, 동시에 (나) 중요한 도덕적 논의를 특정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다. 즉 인용문의 사용이나 양비론의 사용 등을 통해서 기자 자신의 위치를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철학자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개념이지만, 언론인들에게는 아직도 활용될 가치가 있는 규범인 것이다.

    언론 규범의 이중성은 ‘언론의 객관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객관성은 강력하게 의심받고 있지만 동시에 아직도 추구되는 가치인 것이다. 미국의 언론전문직협회(the 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ts)는 1996년 윤리강령을 개정하면서 ‘객관성'에 대한 언급을 없앴다. 협회는 이제 모든 정보원으로부터 정보의 정확성을 검증할 것을 권고할 뿐이다. 풀러(Fuller, 1996) 미국 언론의 객관주의가 쇠퇴했음을 지적하면서, “더 이상 누구도 객관 보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트마와 글래서(Ettema & Glasser, 1998)는 반대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탐사보도 언론인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은 ‘보도에서 양심의 작용이 아닌 경험적 방법의 적용만이 관여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고했다. 즉 미국 언론인들은 아직도 “사실이 말하게 한다” 또는 “언론은 정보를 주고, 독자가 결정한다”는 준칙에 따라 보도한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이 실행에 대한 반성에 근거해서 새롭게 언론규범을 정초하려는 시도라 평가할 수 있는 <언론의 기본요소(the elements of journalism)> 역시 미국 언론인들이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의심과 더불어 피할 수 없는 의존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먼저 진실 추구가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운 원칙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검증과 종합'을 통한 진리의 추구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Kovach & Rosenstiel, 2001).

    정리하자면, 언론의 ‘사실과 의견의 구분' 규범은 이중적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 그것은 ‘사실과 가치의 구분'과 같은 객관주의적 방법론을 명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언론 보도가 사실은 가치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나 의견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숨길 수 있다. 둘째, 이런 숨김을 통해서 언론은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에트마와 글래서(Ettema & Glasser, 1998, p89)는 이를 각각 언론의 아이러니와 이중적 아이러니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런 이중적 규범은 현실적으로 세련되고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동시에 자기 파괴적일 수 있음을 경고했다. 개별 언론인이 이런 아이러니와 이중적 아이러니를 진심으로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언론인 중에는 어떤 아이러니도 경험하지 못하는 순진한 ‘사실과 의견의 분리주의자'부터 가장 교활하게 자신의 경향성을 숨기는 언론인까지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규범이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언론인들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활용된다는 사실에 있다.

    4. ‘사실 주장'과 ‘옳음 주장'에 대한 언론의 윤리

    철학자들은 ‘사실과 가치의 구분'이 불가능함을 논증하고 있으며, 언론인들은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함으로써 한국 언론의 주요한 문제점인 경향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란 개념을 확장할 것을 주장하려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전제들과 개념들이 필요하다.

    1) 전제들

    먼저 나의 주장은 윤리학에서 논의하는 ‘존재에서 당위를 도출할 수 없다'거나 ‘가치는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사실이 아니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과 가치의 구분에 대한 실증주의적 논의는 이미 효과적으로 파산했으며,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도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사실도 몇몇 가치를 전제하고 있다는 퍼트남의 주장, 사실도 아니고 가치도 아닌 두터운 개념들이 있다는 머독의 주장, 그리고 가치는 합리적으로 정당화됨으로써 사실과 같이 기능한다는 본드의 주장 등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언론인들이 주장하는 ‘사실과 의견의 분리'를 위한 장치들이 사실은 언론의 주장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는 에트마와 글래서의 주장도 타당하다고 본다. 스트레이트 기사와 의견 기사의 구분, 정보는 제공하되 판단은 미룬다는 격언에 의존함, 인용부호의 사용과 양시양비론의 활용 등을 통한 주관성 배제 등이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확립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사실과 의견의 구분에 대한 변명처럼 활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언론인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는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것도 가능하며, 동시에 진심으로 ‘사실과 의견의 분리'를 믿는 언론인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2) 핵심 개념들

    하버마스(Habermas, 1976/1979)는 언어사용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의사소통 능력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지에서 보편적 화용론(universal pragmatics)을 제시한다. 이는 일상적인 언어의 분석을 통한 경험적 종합을 통해 얻은 것이라기보다 언어 사용자의 직관적 지식을 형식적으로 분석해서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개별적 언어 사용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모든 개별적 언어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발생 구조를 직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촘스키(Chomsky, 1957)의 언어능력에 대한 재구성을 통한 문법구조의 제시와 유사한 것이다. 그의 방법을 따르면, 언어 사용에 대한 구조적인 규칙 체계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개별적인 문장을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문법적 문장과 비문을 구분할 수 있는 규칙을 얻는 것과 같다. 유사하게, 모든 의사소통은 합리적 기반을 갖고 있다. 그것은 능력있는 의사소통 참여자가 요구하는 진리, 규범성, 진정함에 대한 타당성 요구(validity claims)이다. 이런 타당성 요구는 인지적으로 검증가능하며, 따라서 의사소통의 합리적 기초를 제공한다.

    구체적으로, 하버마스는 오스틴 등의 언행이론에 근거해서, 모든 의사소통은 최소한 이중적으로 수행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내가 전화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경우, 일단 전달된 내용은 ‘내가 전화 하겠다'는 명제의 내용이지만, 동시에 이 말을 하는 순간 두 사람 간의 약속행위가 이루어진다. 즉 간단한 언행라고 할지라도 의사소통은 (가) 소통된 바라고 할 수 있는 명제의 내용 수준과 함께 (나) 발화수반행위(illocutionary acts)를 통해 확립된 화자와 청자가 이해가 발생하는 간주관적 수준에서 동시에 수행된다. 전자가 내용적 소통이라면 후자는 관계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전자가 사실을 표상하는 기능을 담당한다면, 후자는 대인관계를 설정하는 기능을 한다. 결국 전자가 전달된 명제의 내용에 대한 진리를 주장하고, 후자는 확립된 대인적 관계가 옳거나 적절함을 주장한다. 즉 언어 행위의 기능에 따라 서로 다른 두 차원의 의사소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여기에 또 하나의 의사소통 양식인 표현적 수준을 더해서 (다) 화자의 의도의 진정함을 주장하는 의사소통 차원이 있음을 제시했다. 이 차원은 화자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요점은 모든 의사소통이 이 세 가지 정당성 주장을 동시에 포괄하지만, 의사소통의 양식과 기본 태도에 따라 이 중 한 가지가 ‘주제적으로 강조되고' 나머지는 암시적으로 배경에서 전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술적 언행에는 명제의 내용에 대한 참됨에 대한 타당성 주장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대인적 관계의 적절함에 대한 타당성 주장은 잠재적일 뿐이다. 또한 이 경우 화자의 진정함이 표현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도 배경에 암시적으로 전제될 뿐, 진술적 언행의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반대로 규제적 언행의 경우에는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확립된 대인적 관계가 옳거나 적절한지에 대한 주장이 전면에 등장한다. 전달된 내용이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주장과 화자의 진정함에 대한 주장은 잠재적이 된다.

    정리하면 (문장의 문법성은 그 문장이 모든 청자에게 이해가능하다(comprehensible)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해가능한 문장이 발화된 조건에서, 의사소통 양식과 발화 행위의 유형에 따라 <표 1>과 같이 ‘의사소통 능력'의 체계를 재구성해서 제시할 수 있다. 의사소통 능력이란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화자가 현실과 관련된 문장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데, 그것은 (가) 명제의 내용이 사실임을 주장하는 인지적인 진술적 언행, (나) 대인적 관계가 옳거나 적절함을 주장하는 상호작용적인 규범적 언행, 그리고 (다) 화자의 의가가 진정함을 주장하는 표현적인 인정 언행을 포함한다. 모든 이해가능한 의사소통은 이런 세 가지 타당성 주장을 포함하고 있으며, 심지어 상호 이해를 추구하는 의사소통이 아닌 전략적이거나 왜곡된 의사소통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주장에 대한 이해와 응답에 따라 의미 있는 행위가 된다.

    <표 1> 의사소통 양식과 주제적 타당성 요구

    기준의사소통양식과 기본 태도언어행위유형주제주제적타당성 주장현실의 영역보편적언어 기능
    1인지적:객관화 태도진술적 언행명제의 내용참됨외재적 자연의 세계사실의 표상
    2상호작용적:규범확인적 태도규범적언행대인적 관계옳음, 적절함“우리”의 사회 세계정당한 대인관계의 설정
    3표현적:표현적 태도인정화자의 의도진정함“나”의 내적 세계화자의 주체성 노출


    3) 주장: 언론의 진술적이고 규범적 언행

    나는 언론의 ‘사실과 의견의 구분'을 ‘참과 옳음에 대한 타당성 주장의 구분'으로 확장해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언론의 ‘진술적 언행과 규범적 언행에 대한 타당성 주장에 응답할 의무의 구분'이 된다. 언론은 때로 외적 사건과 사실에 대한 ‘참과 거짓(true or false)' 여부를 결정하는 진술적 언행을 수행하며, 때로 공동체의 안녕과 선에 대한 ‘옳거나 그름(right or wrong)' 여부를 결정하는 규범적 언행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두 언행에 대해 요구되는 타당성 주장의 내용이 다르며, 따라서 언론이 이런 요구에 응해서 수행해야 할 윤리적 과제도 다르다. 이런 구분을 혼동하거나, 제기되 타당성 요구에 적절하게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언론의 도덕적 문제가 된다.

    먼저 언론의 진술적 언행에 대해 검토해 보자. 스트레이트 뉴스를 이용해서 사건에 대한 참된 정보를 요약적으로 전달하려는 경우는 물론, 사설과 같은 의견 기사에도 진술적 언행이 수행된다. 즉 언론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사실', 즉 명제적 내용의 참됨에 대한 주장을 제시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수행한다. 이 경우 가치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성, 타당성, 관련성 등과 같은 인식론적 가치들이 전제된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이 개입해야 비로소 사실에 대한 주장이 가능하며 그 내용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언론의 규범적 언행은 진술적 언행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언론은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것을 촉구하거나, 사회적 낭비를 피할 것을 권유하거나, 독자의 관대함을 요구하거나, 독자의 용기를 불어넣는 일 등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런 규범적 언행은 옳거나 그렇지 않아서 그릇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런 규범적 언행을 문제 삼는 타당성 주장이 제기된다면 자신의 언행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모든 문제가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규범적 언행에 ‘참 또는 거짓'의 문제는 주제적으로 강조되어 있지 않을 뿐, 주장의 사실성은 전제되어 있다. 즉 거짓된 정보에 기초해서 타인이나 사회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다.

    <표 2> 언론의 진술적 언행과 규범적 언행

    기준 언행 유형 주제적 타당성 주장 위반 효과 유보 조건 정당화 전략
    1진술적 참됨 거짓 신념 유도 사실 확인은 과정적, 잠정적 경험적 근거 확인, 타당한 추론 검토
    2 규범적 옳음 적절함 관계적 위기, 신뢰의 위기 사회 규범은 때로 억압적 다양성, 공정성, 균형성 등 원칙의 검토
      

    언론의 진술적 언행에 대한 타당성 요구가 위반되면, 사건이나 사태에 대한 거짓된 신념을 유발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위반 효과가 초래하는 문제점 때문에 언론은 윤리적 책임을 진다. 그런데 이런 책임에는 유보 조건이 따른다. 진술적 언행은 사실, 즉 참된 명제를 추구하는 데,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는 시간과 비용이 들며 사실은 항상 잠정적으로만 그러하므로, 언론과 같이 시간적 압박을 받으며 진술적 언행을 수행해야 하는 제도로부터 사실상 완전한 사실의 규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마도 완전한 사실의 규명이란 일련의 불완전한 사실들의 충돌을 통해서 장기간에 걸쳐 사후적으로 확보되는 것일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개별 언론사는 언제나 낙종하고, 언제나 오보를 낼 수밖에 없다. 완벽한 커버리지와 완전한 진리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의 본성 때문에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정당화 전략이 무용화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 근거를 확인하고, 자료를 검증하고, 근거가 결론을 지지하는지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 등 일련의 검증기법을 사용하면 된다.

    언론의 규범적 언행에 대한 타당성 요구가 위반되면, 언론은 독자 또는 정보원가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하며, 결국 그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따라서 규범적 언행에 전제되는 일련의 가치들, 즉 다양성, 공정성, 균형성 등과 같은 고전적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 가치를 실현하는 보도야 말로 관계적 적절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된다. 하지만 때로 사회적 규범은 억압적이며, 언론이 가정하는 규범 역시 그러하다. 예를 들어, 때로 사회적 공동선의 추구는 다양성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다양성의 추구는 공동체의 공통분모를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유보적 조건 때문에라도 규범적 주장은 그때그때 합리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모두가 원칙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가치에 근거해서 정당화되지 않은 규범적 언행은 타당하지 않으며, 따라서 옳음을 주장할 수 없다.

    결국 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는 언론의 ‘진술적 언행과 규범적 언행에 대한 타당성 주장의 구분'이란 언론의 참에 대한 주장과 옳음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각각 정당화해야 할 내용과 절차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분명 철학자들의 ‘사실과 가치의 구분'과 같은 형이상학적 구분이나 언론인들의 ‘사실과 의견의 구분'과 같은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구분과 다르다. 그러나 나의 구분은 그들이 문제 삼았던 고민의 핵심을 보존하고 있다. 첫째는 참과 거짓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과 옳고 그름을 다루는 방법은 다르며 그에 대처하는 윤리적 의무도 각각 다를 것이라는 철학자의 염려이다. 둘째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사실은 정당화할 수 없는 규범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언론인의 오래된 양심과 관련된다. 이 두 가지 고민에 대응하기 위해 지금까지 활용되었던 ‘사실과 가치의 구분'과 ‘사실과 의견의 구분'은 무용하거나 남용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고민의 핵심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본다. 철학자들과 언론인이 염려하고 고민했던 바에 대해서 진지한 검토와 대처가 필요하다.

    진술적 언행과 규범적 언행의 구분은 언론의 윤리적 기반을 강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내용으로 제기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응답되어야 하는 타당성 주장을 분명하게 하고 그에 대응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대한 진술적 주장에 대해 제기되는 경험적 검증과 타당한 추론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언론을 윤리적이라 평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옳음이나 적절함에 대한 규범적 주장에 대해 제기되는 타당성 주장에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정당화하지 못하는 언론도 윤리적이라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타당성 주장을 교란시켜서 진술적 언행을 ‘옮고 그름'의 문제로 전환시키거나 ‘규범적 언행'을 ‘참과 거짓'의 문제로 치환시킴으로써, 제기된 타당성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언론은 더욱 문제가 크다. 이 두 언행을 구분하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는 타당성 주장에 대응해서 근거를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설명하는 언론은 윤리적이다.

    5. 결론을 대신해서: 언론의 경향성 극복을 위한 실천 과제

    이 글에서 나는 고전적인 언론 규범인 ‘사실과 의견의 분리'와 관련된 철학적, 언론학적 논의를 검토한 후, 그것을 ‘언론의 진술적 언행과 규범적 언행에 대한 타당성 주장의 구분'으로 확장시켜 이해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확장을 통해서, ‘사실과 가치의 분리'의 무리함이나 ‘사실과 의견의 분리'와 같은 이중적인 아이러니를 피해서 언론 윤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결론을 대신해서, 한국 언론에 흔히 나타나는 경향적 특징을 스트레이트 기사와 의견 기사로 잠정적으로 구분해서 검토하고, 그런 경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언론 윤리적 고려사항을 제시하려 한다.

    앞서 제시한 한국 언론의 경향적 특징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스트레이트 기사에 나타나는 사실의 선택, 윤색적 표현, 전제된 가치 등과 의견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근거 없는 의견, 불균형, 불공정 등이 그것이다. <표 3>은 각각의 경향적 특징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타당성 요구를 제시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언론이 취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제시한다. 마지막 칸에는 <언론의 기본요소> 등 언론윤리 규범을 정리한 내용에서 발췌한 각 윤리 의무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실천적 규칙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스트레이트 기사가 사실을 자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전체적인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 과연 선택된 사실이 독자의 관심이나 이해에 견주어 완전한지에 대한 요구가 제기된다. 이 경우 언론의 윤리적 의무는 바로 이 요구에 답하는 것, 즉 기사의 현실에 대한 관련성과 기사 내용의 완전한 재현을 검토하는 것이 된다. 이를 위해서 언론인은 배경자료를 찾아본다든지, 관련 정보원을 폭넓게 인터뷰 하는 등 대처할 필요가 있다.

    <표 3> 언론의 경향성 극복을 위한 실행 규칙

    기사 종류 경향적 특징 타당성 요구 언론 윤리적 의무 언론인의 실행 규칙
    스트레이트 기사 사실의 선택 관련성 요구 관련성과 완전성 검토 배경 자료의 검색관련 정보원 인터뷰
    윤색적 표현 진정성 요구 표현의 타당성 검토 “더하지 말 것” 겸손 및 중용적 판단
    전제된 가치 관련성 요구 가치의 적절성 검토 취재 동기의 투명성 누가 주요한 독자인가?
    의견 기사 근거 없는 의견 사실성 요구 사실성과 정확성 검토 관련 자료의 수집 복수의 정보원 확보
    불균형 균형 요구 다양성과 균형성 검토 다양한 정보원의 확인 주장과 반대주장 균형추구
    불공정 공정성 요구 당사자 참여 검토 기사 내용 당사자 반영 당사자를 대변자 찾기


    ■ 사실 기사의 정당화 방식 교육

    ■ 의견의 진정성과 주장의 공정성에 대한 교육

    ■ 취재 관행의 개선